틴토레토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거하신 그리스도
1580년경 캔버스에 유채,뮌헨 알테피나코테크, 손님 맞을 준비는 소홀히 하고 예수의 말씀만 듣는다고 언니에게 책망받는 마리아의 그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가장 아끼는 제자의 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녀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때 그의 곁에 있었고, 예수가 묻힐 때에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아가 예수가 부활한 것을 제일 처음 목격한 이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만큼 예수를 사랑했고 그에 값하는 예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서양의 미술가들이 이 성녀를 즐겨 그린 것은 이러한 그녀의 헌신을 기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참회자로서 그녀의 남다른 모습 그녀가 자신의 죄를 진솔하고도 진정하게 회개한 대표적인 인간이라는데 무엇보다 이끌렷기 때문입니다.
서양 기독교는 오랫동안 이 절절한 참회의 주인공을 예수가 그 안에서 일곱 귀신을 쫓아낸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여인뿐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마 마르다의 여동생 마리아도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인으로 쳤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를 그릴 때 이 두여인의 이야기를 함께 그렸습니다. 그러나 동방 정교회는 이 세 여인을 각각 다른 존재로 인식했으며 현대의 신학자들도 이 세사람을 서로 다른 이로 구별해 보는 추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참회하는 모습에 치중해 막달라 마리아를 그린 서양회화는 전혀 엉뚱한 인물을 그녀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잘못 표현한 셈입니다. 중세 교회의 성인 숭배 열기가 자아낸 혼란의 잉태물이라 하겠습니다.
안니발레 카라치의 풍경 속에서 기도하는 성녀 막달라 마리아
16세기 이탈리아 화가로써 참회자의 모습을 매우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붉은색 옷을 수수하게 걸친 여인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처연히 땅 끝을 바라봅니다. 손을 단정하게 깍지 끼고 잇는 그녀의 몸은 마음의 슬픔에 조응해 다소곳하게 움츠러들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지금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죄로 인한 슬픔입니다. 그 슬픔의 무게는 배경의 어둠만큼이나 무겁습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젊음,아름다움, 이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지금 관심 밖의 일입니다. 그녀가 구하는 것은 오로지 회개를 통한 죄사함입니다. 오른편나무에 묶인 자그마한 십자가상이 그 죄사함을 보증하는 징표입니다. 그림 왼편 맨 아래쪽에는 해골과 기름 그릇이 있습니다. 짙은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는 않는 이 상징물은 회개의 의미를 밝혀주는 것입니다. 해골은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기름그릇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옥합을 깨뜨려 그 향유를 예수의 발에 바르는 행위가 진정한 참회임을 각각 상징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머리를 풀어헤친 것도 성경의 여인이 예수 앞에 울며 나아와 자신의 머리로 에수의 발을 닦은 것을 상기시키는 이미지입니다. 회개란 이렇듯 자신의 전 존를 풀어헤치고던져 깨뜨리는 것입니다.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밤 등불앞의 막달라 마리아
17세기 프랑스의 화가로 이 그림엔 마리아는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카라치의 마리아에 비해 더욱 명상적인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슬픔 속에서 깊은 상념에 빠져든 참회자. 촛불 하나가 조용히 타올라 그림을 보는 이도 자연스럽게 깊은 사색에 젖게 됩니다. 탁자 위에 있는 책 옆으로 나무 십자가와 채찍이, 그리고 그녀의 무릎위에는 해골이 놓여 있습니다. 역시 전형적인 그녀의 상징물들입니다. 채찍은 예수의 수나을 상징합니다. 모든 인간을 원칙적으로 죄인으로 보는 기독교의 시각에 니체가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은 그런 입장이 인간을 비주체적인 존재로 노예로 만든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회개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미지가 한 시대를 풍미한 것은 앞서도 언급했듯 종교개혁에 대한 당시 가톨릭 교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반격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 자체는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그것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또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참회를 독려하는 이런 주제의 그림은 그 주인공의 눈물만큼 순수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에서도 진실한 감동을 얻고 그렇지 않고는 철저히 관자의 몫입니다. 감상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주치젝인 행위이니깐요. 개인적으로 막달라 마리아 주제의 그림들을 볼때마다 깊은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 참회가 감동적으로 다가오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보다 동행이라는 단어가 맞는듯합니다. 예수가 박해받을때 제자들 대부분은 도망가거나 숨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예수가 무덤에 묻힐 때까지 예수와 동행을 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 여생을 예수정신과 동행을 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무엇보다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영원한 외로움의 시작일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진정한 동행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위대한 인간의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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